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프란츠 콘라트 폰 회첸도르프 (문단 편집) ===== [[트렌티노 공세]] ===== 독일은 콘라트가 제국군 주력을 동부전선에 돌려주기를 원했다. 동부전선을 제국군에게 맡기고 여기서 차출된 사단들을 서부전선으로 투입하여 결정적인 승리를 얻겠다는 속셈이었다. 그러나 콘라트는 콘라트대로 생각이 있었다. 그중 하나는 트렌티노에서 결정적인 공세를 가해 이탈리아의 평야지대를 빠르게 가로질러 이탈리아 북부의 중요도시를 점령한다는 것이었다. 콘라트는 결정적인 공세 장소로 아시아고 고원 지역 일대를 선정했다. 콘라트는 3월 [[이손초 전투]]에서의 [[이탈리아 왕국군]]의 5번째 공세가 실패하자 아시아고 방면의 이탈리아 왕국군 전력이 약하다고 분석한 후 해당 지역으로 40만명의 대규모 병력을 동원하여 공격하기로 했다. 기본적인 목표는 이손초강 일대에 가해지는 이탈리아 왕국군의 압박을 줄이는 것이었는데, 만약 작전이 매우 잘 풀려서 베네치아와 베로나까지 점령에 성공한다면 아예 이손초 일대의 이탈리아 왕국군을 포위섬멸 하는 것까지 생각해두고 있었다. 그리하여 [[트렌티노 공세|트렌티노에서의 공세]]를 위해 [[독일 제국군]] 장군참모장인 에리히 폰 팔켄하인에게 9개 사단가량의 지원병력을 요청했지만 팔켄하인도 서부전선에서 대규모 공격을 계획 중이었으므로 이 청을 거절하였다. 팔켄하인은 콘라트의 공세 작전을 듣고 크게 놀랐다. 당시 독일군은 1문의 중포라도 아쉬운 판이었다. 하지만 콘라트는 자신의 공세를 위해 상당주의 중포를 틀어쥐고 놓아주지 않았으며, 무리하게 발칸 전선과 동부전선의 정예부대를 차출하여 이탈리아 전선에 투입하였다. 그 병력의 공백은 강력한 방어선으로 만회할 수 있다는 판단에서였다.[* 후대에서야 콘라트의 대표적인 실책이라고 까이지만, 사실 이건 [[결과론]]에 입각한 비판이며 당시 콘라트의 판단은 합당하였다. 러시아 제국은 [[고를리체-타르노프 공세]]에서의 패배를 기점으로 폴란드를 잃었고, 무능한 [[니콜라이 2세]]에 대한 러시아 국민들의 민심이 크게 나빠졌다. 뿐만 아니라 러시아는 [[오스만 제국]]과도 전쟁중이였다. 이런 상황에서 다시 병력을 긁어모아 독일과 오스트리아-헝가리에게 반격을 가한다는것은 러시아 제국 스스로 [[자충수]]를 두는것과 다름 없었다.] 하지만 팔켄하인은 제국군이 포병대 면에서 압도적인 우위를 점하고 있다 하더라도[* 제국군은 2,000문의 야포를 동원했고, 그 가운데 500문이 중포였던 데 반해 이탈리아군은 겨우 588문의 야포와 36문의 중포밖에 없었다.] 겨우 18개 사단의 병력으로는 공세를 성공시킬 수 없다고 생각했다. [[1916년]] [[5월 15일]], 제국군의 [[트렌티노 공세]]가 시작되었다. 제국군은 새로이 단시간에 집중포화를 퍼붓는 전술을 사용하여 이탈리아군 참호선을 말 그대로 박살을 내놓았다. 비좁은 계곡지대에서는 제국군의 중포대의 포격 효과가 극대화되어 눈사태와 산사태를 일으킴으로써 계곡을 지키던 이탈리아군을 생매장해버리기도 했다. 그러나 지형이 험해 제국군의 진격은 지지부진할 수밖에 없었고, 이탈리아군은 그 덕분에 전멸이라는 최악의 사태를 피할 수 있었다. 이탈리아의 정예 알피니 산악부대는 자신들의 앞마당과 같은 산악지대에서 필사적으로 지연전을 펼치며 이탈리아군 본대가 방어선을 구축할 수 있는 시간을 벌었다. 그러나 이탈리아군 암호책을 노획한 제국군은 이탈리아군의 무선통신을 방수하여 이탈리아군의 움직임을 손바닥 보듯 알 수 있었다. [[6월 4일]] 제국군은 비센차와 이손초강 전선에 보급품을 운반하는 핵심 철도로부터 채 20마일도 떨어지지 않은 곳까지 진출했다. 그러나 목표지점을 코앞에 두고 제국군은 힘이 다하고 말았다. 이탈리아군이 반격에 나서 압박을 계속 가한 끝에 제국군을 공격개시선까지 밀어내는데 성공했다. 팔켄하인은 콘라트가 동부전선에서 병력과 중포를 빼돌려 이탈리아 전선에서 공세를 시작한 것도 모자라 공격에 실패한 데 대해 크게 분노했다. 콘라트의 공세로 동부전선의 제국군의 전력이 약화된 덕분에 브루실로프가 성공적인 공세를 펼칠 수 있게 기회를 마련한 것이었다. 이후 이손초강 부근에서 전투가 5차례 더 벌어지면서 사상자 수도 크게 증가했다. 결국 8월에는 고리치아를 이탈리아군이 점령했고, 제국군의 방어선도 곧 돌파할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이탈리아군의 공격도 거기까지였다, 겨울이 닥치자 양측 모두 대규모 작전 활동을 중지할 수밖에 없었다. 겨울동안 이탈리아군과 제국군은 소규모 습격과 정찰 이상의 활동은 벌이지 않았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